신장은 우리 몸의 노폐물을 걸러내는 핵심 장기다. 흔히 신장 질환이라 하면 그 원인 또한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신장암과 만성 신장병은 발생 기전부터 원인 물질까지 확연히 구분된다.
예를 들어 용접 과정에서 발생하는 용접 흄은 신장암의 대표적인 발암 요인이지만,
먼지 형태로 흡입되는 결정형 유리규산은 신장의 여과 기능을 마비시켜 만성 신장병을 일으키는 주요 독성 물질이다.
표적 장기는 신장으로 같을지라도 어떤 물질은 유전자를 변형시켜 암을 유발하고,
어떤 물질은 조직 자체를 파괴하지만 암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발암물질 해당 여부가 다르게 판단되는 이유는 뭘까.
국제암연구소(IARC)의 발암성 결정 기준을 통해 살펴보자.
발암성을 증명하는 두 가지 기둥
국제암연구소가 특정 물질의 발암성을 판단할 때는 두 가지 과학적 근거를 병행해 검토한다.
첫째는 대규모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역학연구다.
이는 특정 물질에 노출된 노동자 집단이 비노출군에 비해 암 발생 확률이 통계적으로 얼마나 높은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쉽게 말해 “특정 유해요인에 노출된 사람 100명 중 10명에게 특정 암이 발생했다”는 통계적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둘째는 질환의 발생 원리를 분석하는 것이다.
해당 물질이 체내에 들어와 어떻게 암세포를 만들어 내는지 그 과학적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특정 유해요인에 노출된 사람의 세포에서 DNA가 손상된 흔적이 발견됐다”는 생물학적 증거를 찾아내는 방식이다.
통계적 데이터가 부족하더라도 암을 유발하는 과학적 원리가 명확하다면 발암 등급은 높아질 수 있다.
인과관계의 확실성
국제암연구소는 연구의 완성도에 따라 발암성에 대한 증거 수준을 부여한다.
‘충분한 증거’는 해당 요인에 노출되는 것과 인간의 암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가 확실히 정립됐다는 뜻이다.
우연이나 흡연 등 외부 요인의 간섭을 철저히 배제하고 인과관계를 확립했을 때 부여되며,
그룹 1(확정적 발암물질) 분류의 핵심 근거가 된다.
‘제한적 증거’는 인과관계가 어느 정도 설득력은 있지만 이를 확신하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있다는 뜻이다.
조사 과정에서의 오류나 제3의 요인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어려울 때 부여된다.
인체 증거가 제한적이더라도 동물 실험 결과가 충분하다면 그룹 2A(발암성 추정 물질)로 분류된다.
증거 수준의 높고 낮음은 유해요인이 법적으로 암의 원인 물질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난해 등급 승격한 ‘자동차 휘발유’
이러한 엄격한 평가 기준을 바탕으로 국제암연구소는 5년마다 ‘우선순위 자문 그룹’을 열어 재평가 대상을 결정한다.
지난 2019년과 2024년,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노출 인구가 가장 많음에도 평가가 정체돼 있던 휘발유를 최우선 재평가 대상으로 권고했다.
지난해 3월 16개국 과학자들이 모여 자동차 휘발유의 발암성을 전면 재검토했다.
그 결과 자동차 휘발유는 기존 ‘발암성 의심 물질(그룹 2B)’에서 ‘인체 발암물질(그룹 1)’로 승격됐다.
기존에는 휘발유 노출 시 벤젠이나 납 같은 특정 성분을 개별적으로 증명해야 했으나,
이제는 ‘자동차 휘발유’라는 복합물 자체가 확정적 발암물질로 인정된 것이다.
휘발유 노출 사실만으로도 방광암·위암·신장암 등의 산재 인과관계를
더욱 폭넓게 인정받을 수 있는 법적·과학적 토대가 마련됐음을 의미한다.
과학은 멈춰 있지 않는다.
어제는 인과관계가 불분명했던 유해물질이 오늘의 최신 연구를 통해 확정적 발암물질로 밝혀지기도 한다.
국제암연구소의 등급 변화는 단순한 학술 발표를 넘어 고통받는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의 근거를 제공하고 일터의 안전 기준을 바꾸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결국 직업병을 증명하는 과정은 끊임없이 최신화되는 과학적 근거를 법적 언어로 치환해 현장에 적용하는 일이다.
휘발유 1급 발암물질 승격이 더 많은 노동자에게 실질적인 보호와 치유의 기회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